[한경에세이] 천상병 시인 생각

입력 2023-09-21 18:52   수정 2023-09-22 00:22

추석이 코앞이다. 한 해의 결실을 거두는 계절이다. 들판엔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하늘에는 둥두렷 보름달이 떠오른다. 달의 살이 꽉 차오르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살도 조밀조밀 차오른다. 달이 얼마나 휘영청 밝으면 “저 둥근 달빛에 꽃나무 가지 휘어진다”는 표현도 나온다. 시골 아녀자들 입담이지만 격조가 높다. 추석엔 떠나온 고향 집도 방문하고 가까운 이들과 선물도 주고받는다. 부모와 자식이 다시 만나고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추석은 예로부터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요즘 추석은 전통적 정감과 다르다. 성묘는 미리 하고 고향 찾는 자식 힘들까 봐 부모가 자식을 찾기도 한다. 며느리가 차례상 차리고 이틀 사흘 손님 접대하는 풍속은 점차 사라져간다. “시어머니가 왜 가족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예비 며느리도 있는 판이다. 도시의 직장인에게 추석은 곧 휴가로 이어진다. 같은 추석인데 옛날과 지금이 다르다. 공동체의 풍요에서 개인의 풍요로 옮겨간다.

추석은 풍요의 한복판이다. 이런 날 나는 가난한 시인 생각이 난다. 대학 다닐 적에, 한국문인협회 사무실에 나가 아르바이트할 적에, “500원만…” 하면서 내게 막걸리값을 받아 가던 천진무구의 천상병 시인이다. 그는 원래 패기만만한 젊은 문사였으나 정권의 탄압을 받아 몸이 많이 상한 뒤 어린아이 마음으로 돌아간 특이한 시인이었다. 경제적 능력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런 가난은 오히려 천상병의 재산이었다.

누구나 그를 도와주고자 했다. 천사의 마음을 지닌 시인이 굶어 죽었다는 소리를 들을 순 없지 않은가. 친구 여동생이 보살심을 발휘해 그와 혼인 후 생계를 책임졌다. 그녀는 인사동에서 찻집을 운영했고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그녀에게 천상병 시인은 남편이자 아들이며 동시에 아기 천사였다.

대학 졸업 후에도 이들 부부는 나를 곧잘 기억해주었고 순정한 눈빛과 다정한 미소로 반겨주곤 했다. 시인은 올해 30주기를 맞았다. 남편 옆에 합장한 부인도 13주기가 됐다. 세월은 흘러도 시인 천사의 눈빛과 그 수호자의 미소를 잊을 수 없다. ‘소릉조’라는 제목이 붙은 추석에 관한 시 한 편을 떠올려본다.

“아버지 어머니는/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배기 나는/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가지 못한다.//저승 가는 데도/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가지도 못하나?//생각느니, 아,/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마지막 구절이 압권이다. 한탄의 목소리처럼 들려도 사실은 생의 이면을 발견한 순간에 대한 감탄이다. 시인은 윤회전생의 깊은 의미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처절한 가난을 천의무봉한 바느질 솜씨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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